호국 불교 정신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요?
본문
질문
부처님의 뜻을 받드는 불제자들은 항상 겸손하고 숭고하게 호국 불교를 염원하면서, 한생각을 호국 불교의 정신으로써, 나가서 몸뚱이로 돌아치는 게 아니라 항상 앉아서 염원하면서 게으르지 않게 정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스님께서 가끔 말씀하셨습니다만, 저희처럼 공부가 미천하고 이 마음공부의 길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초심자들은 호국 불교 정신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가르침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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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가 호국 불교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호국 불교라는 이름도 이름인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살고 있느니만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만큼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 하겠기에 하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여러분의 마음 하나가 하는 게 아니라, 바로 ‘주인공!’ 하면 천체 일체 만물만생의 그 마음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분야든지 여러분이 잘 듣고 잘 봐서, 시각적으로나 촉각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오관을 통해서 볼 때에, 세계적으로 어떠한 문제가 있다면 한생각 낼 수 있는 그 마음이 바로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육신으로 찾아다니면서 했지만 지금은 한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한마음이 그렇게 무궁무진하게 참, 세계적으로 어느 생명이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내 몸이 아닌 게 없기 때문에 어느 분야에도, 만약에 과학자들의 몸이라면 바로 그 몸이 내 몸이 되는 그런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주인공 안에는 무지하게 수많은 법신과 보신과 화신이 있으며 진여의, 무루의 그, 정말 무궁무진한 자신의 그 신들이, 무형신들이 헤아릴 수 없이 있으니 내 한생각에 무조건 법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요량을 모른다면 앉아서 한생각을 내서 우주를 다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주를 다룰 수 없고, 내 마음 하나 다룰 수 없다면 모든 것을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정말이지 앉아서 호국 불교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그 도리를 아시게 된다면 바로 방방곡곡에 손이 안 닿는 데가 없고 발이 안 닿는 데가 없고 참, 그 마음의 향운공이 어디고 닿지 않는 데가 없고 양식이 안 되는 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 자체가 향과 같이 풍겨 나가면서 수없는 사람들을, 나쁜 사람들은, 독재는 평화스럽게 이루도록 다루어 나가고, 인색하지 않게, 풍요롭게 다루어 나가면서 사랑을 하게끔, 도의와 의리를 지켜 나갈 수 있게 하는 그 마음을 준다면, 바로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돼서,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서 우리나라를 잘 다스려 나갈 수 있고, 바로 우주와 더불어 상응을 할 수가 있으니 여기는 그대로 천국이 될 수 있는, 아니 물질과학보다도 정신과학으로, 또 문명으로도 발전이 되고 아주 풍부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가난하면 우리나라도 가난할 것이요, 전체가 나 아님이 없다는 소리는 언감생심 말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그 참뜻을 알아서 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유심과 무심이 어떻게 해서 유심과 무심이라고 이름을 두 개를 지었을까. 무심은 바로 무루의 그 참자기의 마음, 예전에도 얘기했죠, 금강 자석과 같은 거라고. 그러니까 그런 금강 자석과 같은 움죽거리지 않는 능력으로, 유심으로서는 아주 어떤 분야든지 가서 일을 할 때에 끊고 맺듯이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유(有)의 법으로만 기울어져서도 아니 되고 무의 법으로만 기울어져서도 아니 되고, 양 개체를 다 한꺼번에 한 주먹에 쥐고 주먹을 불끈 들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이라야만이 천국을 만들 수 있고, 천국을 다스릴 수 있고, 이 세상을 다스릴 수가 있다. 그럼으로써 그 부처는 법신의, 또 법신의 그 능력으로, 화신으로서, 보신으로서 바로 호국 불교를 다룰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으로써 전자에는 그렇게 어렵게 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앉아서들, 누가 하라, 말라 할 게 없이 내 자신을 밀고 나간다면 그대로, 그대로 될 것입니다. 마음을 좁게 쓰지 말고 좀 더 넓게 써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여러분에게, 모두 전체에게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제가 말씀드린 걸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요.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산으로 올라가다 보니까 그 돌팍 밑에 소나무가, 배배 틀려 가지고 올라간 소나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나무를 보는 순간 말입니다, ‘야, 너도 배배 틀려서 나와 똑같구나.’ 그런 생각이 무뜩 들면서 그 나무 한 그루가 내 몸과 같이 참 가련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련해서 가련한 게 아니라 그것이 둘이 아니어서 그런 생각이 드니까 “참, 너도 나와 똑같구나.” 하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소나무가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나는 비비 틀려서 이렇게 돌팍 속에 있는 거라고 생각이 되지만 당신은 왜 그렇게 비비 틀려서 걸음을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그렇게 가면서도 가질 못하고 있습니까?”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랬습니다. “너 때문에 그렇다.” 그랬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다고 하니까, 그것에는 아무 소리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서 또 지나가다 보니까 토끼 한 마리가 깡충깡충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토끼가 이렇게 가다가 이쪽으로 홱 돌아서면서 나를 이렇게 힐끔힐끔 보면서 빨리 가지를 않고 무츰무츰하면서 돌아섰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 생각 없이 가는데 토끼를 쫓아가다 이렇게 돌아서면서 보니까 그 아래는 천야만야한, 즉 말하자면 덫을 놓은 자리입니다. 덫을 크게 놓고 거기에 짐승들이 빠지면 잡으려고 구덩이를 파 놓은 자리예요. 그 토끼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내가 거기에 빠졌을는지도 모르죠. 토끼가 어쩌면 그렇게 영리하게, 무츰무츰 가면서 나를 돌아다봐 가면서 그렇게 가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때에 아차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 ‘야, 토끼야! 너도 나하고 둘이 아니구나. 어쩌면 둘이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 이렇게 편안하고 전부, 풀포기 하나도 내 친구 아님이 없으니 나는 참 기쁘다. 외로움도 없고 고독함도 없고 모두가 친구로구나!’ 하면서 참, 너무 기뻐서 토끼를 안아 주려고 쫓아가다 보니까 토끼는 토끼대로 놓치고 나는 나대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토끼는 갔지만 나하고 토끼하고는 항상 같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풀잎과 이 산천초목이 다 나와 친구고 벗이 돼서, 내 가슴에 언제나 항시 같이 있기에 나하고 항상 벗이 돼 줘서 내가 길을 잃으면 항시 일러 주었습니다. 나무도 길을 안 일러 준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몇 시나 됐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벌써 ‘지금은 어느 때쯤 됐지.’ 하는 그런 말을 전해 줬습니다. 그게 왜 그런가? 내가 나를 통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 여러 생명들하고 다 같이 통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바로 앉은 좌가, 좌선이라는 것이 선방에만 앉아서 좌선이 아니라 앉았다 서고, 눕고 자고 깨고, 화장실에 가고 먹고 이런 것이 전부 참선이라는 뜻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모든 거, 하나하나가 선 아닌 게 없고 의정 아닌 게 없으니, 모든 것을 그렇게 해서 우리가 참선이라는 것이 감응이 되고 알아질 때, 비로소 모든 그 위력이, 천 가지 만 가지 헤아릴 수 없는 위력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는 거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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