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고에 대한 두려움 극복하고 싶어요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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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고에 대한 두려움 극복하고 싶어요

본문

질문

보왕삼매론에도 “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으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만 육신의 병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특히 요즘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병고가 닥치더라도 두려움 없이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여러분들은 어디가 아프다 이런다면 그저 그 아픈 것만 생각하고 야단법석들을 하는데, 또 어디가 무너졌다 그러면 무너진 것만 가지고 법석들을 하는데, 지금 시급한 게 뭡니까. 그 무너짐과 병세 어떠한 문제들이 다가오는 거보다 더 시급한 게 바로 벗어나는 게 시급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병 증세나 어떠한 걸 가지고 그거를 방편을 삼아서 공부해라.” 이런 것이죠. 모든 게 자기가 지어 놓고 자기가 모든 거를, 인과성이나 유전성이나 다 자기가 가져 있는 거니깐 ‘너만이 알아서 할 수 있어!’ 그러곤 다 버리라니깐 안 버리고 오히려 그냥 그거 낫게 하는 것만 가지고 야단이거든요. 하나가 없어지면 둘 셋이 다 없어지는데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약사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이다 지장보살이다, 왜 이름을 내놨겠습니까? 그 관리인들의 이름은 이름일 뿐이지, 여러분들도 다 거기다 한데 합쳐 놓으면 보살이나 중생이나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모든 게 부처와 둘이 아니로 되는 거다. 둘이 아닌 까닭에 의식들의 그 인과성도 병 증세도 그냥 없어지는 거죠. 그런데 먼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병부터 생각하니까, 나빠진 것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인생은 짧고 벗어나기는 긴데 어떻게 이것을 처리해야 하느냐. 그 처리는 한생각밖에는 없습니다, 한생각! 이렇게 살아도 한 인생, 저렇게 살아도 한 인생입니다. 이렇게 살면 어떻고 저렇게 살면 어떻습니까?

가만히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말입니다, 모두 사람들이 우글우글해도 사람이라고 곤충하고 뭐 다른 게 있으며 벌레하고 뭐 다른 게 있으며 짐승하고 뭐 다른 게 있느냐. 모습만 천차만별로 다를 뿐이다. 모두 이 몸 자체 속에다가 곤충을 넣어 놓고 그것이 제가끔들 돌아서 제가끔들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사람들이 이러고 사니까 그것마저 쫓아서 그렇게 하고 살다 보니깐 못된 병이 생기고 그러는 거죠. 벌써 곤충들이 싸움이 나서 서로 잡아 죽이면 죽이는 쪽이 그냥 굳어지는 쪽이죠. 이러한 사태를 모두 알고 이걸 대치를 해서 지내면서, 사는 것도 좀 유유하게 좀 편리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마음의 조작이지 육체의 조작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부터 육체는 움죽거리게 돼 있으니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렇게 태어나기 이전의 자기를 무시하는 거예요. 태어나기 이전 자기는 정신계의 자기고, 정신계의 자기가 지금 현실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는 바로 자기가 형성시켜서 놓은 자체거든요. 그런데 자기 나무가 자기 뿌리를 어떻게 무시하겠습니까. 병이 낫고 안 낫고 일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그거는 자기한테 그대로 보배로서 있는 건데, 그거를 진짜 알아서 우리가 둘 아닌 도리, 내가 항상 말씀드리는 그거를 알고 ‘낫게 하든지 낫지 않게 하든지, 둘이 아닌 까닭에 너만이 할 수 있지 않아. 지켜 주는 것도 너고, 이끌어 주는 것도 너고, 해결사도 너고, 죽이는 것도 너고 살리는 것도 너야. 너만이야. 너만이 있어. 너만이 함이 없이 할 수 있고, 너만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게 할 수 있고….’ 지금 보이는 나와 안 보이는 너가 둘이 아닌 까닭에 항상 내가 보이면 자기도 보이고 내가 안 보이면 자기도 안 보이고, 이렇게 돼 있는 건데 그렇게 밀접하게 돼 있는 건데도 불구하고 이거는 어떤 때 들어 보면 아주 얼토당토않은 그런 말씀들을 하거든요.
 
어떤 분은 어디가 어떻다고 어떻다고, 이렇게 그냥 치명적인 말을 병원에서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느냐?” 하고 물으니까 3년이나 4년 됐대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당신이 그렇게 됐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텐데 어찌 그래?” 그러면 씽긋이 웃으면서 “오기는 그렇게 왔으나 몇 번 오지는 않았어요.” 이러는 겁니다.

마음공부 하는 이 도리는요, 한 번 인연을 만나는 게 천 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렵다는 겁니다, 이 마음공부 하는 게. 이 옷 벗고 옷 속의 그 곤충의 세계를 다 벗어 버리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이 말입니다. 항상 그 보기 흉하고 그런 곤충 속에서 우리가 헤어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부처는 못 된다 하더라도, 비천상 보셨죠? 날아다니면서, 금비까빈가 은비까빈가, 그런 것처럼 그저 이것도, 이 모습으로도 됐다가 저 모습으로도 됐다가, 이거를 건지려면 이 모습으로도 되고 저거를 건지려면 저 모습으로도 되고 이렇게 해 가지고선 다 건지고 가지 않습니까.
 
하여튼 중요한 거는 우리가 이 몸속에 들어 있는 곤충들도 자기 모습이니까 모든 거를 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꼭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나온다 하더라도 둘이 아니에요. 나는 귀신이 나온다 이러면 그 참, 보이지 않는 데 어떠한 귀신이다, 어떠한 신장이다, 어떠한 뭐다 하더라도 겁 안 나는 게 뭐냐 하면 산 사람도 산 귀신이에요. 허허허. 죽은 사람은 죽은 귀신이고요. 그런데 산 귀신이 더하지 죽은 귀신이 더하겠습니까?  그런데 죽은 귀신이나 산 귀신이나 둘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귀신은 귀신끼리 해결을 하는 거죠. 항상 둘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주인공에다 모든 걸 맡겨라 이런 거예요.

정신계에서 귀신같이 노는 거는 전부…, 이거 보세요. 공에다가 그냥 모두 집어넣으면, 공을 집어넣으면 뭐가 남습니까, 거기. 공에다 공을 집어넣는데 그 얼마나 빨라요, 글쎄. 사람들이 그냥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가지고 그냥…. 그까짓 거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 너 있으면 나 있고 나 있으면 너 있고 모두가 둘이 아닌데 말입니다. 세울 것도 없고, 찾을 것도 없고, 볼 것도 없고, 알 것도 없고 모든 게 그런데 뭐가? 모두가 둘이 아닌데 이 컵과 컵이 둘이 아니라면 한 컵이, 자기 컵 하나가 자기 컵을 깨트리겠습니까? 마주쳐야 깨트려지지. 그걸 명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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