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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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불자라면 삼귀의, 즉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 그리고 스님들께 귀의하는 삼귀의를 하게 되는데 자성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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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가 보면 느껴지고, 들으면 느껴지고 그렇게 알아지는 거 아닙니까? 알아지는 그 생활 자체가 그대로 여여하면, 그대로 우리가 믿고 여여하면요, 그렇게 아예 한마음으로 그냥 하면 그 세계가, 삼세계(三世界)가 바로 삼보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삼세계가 삼보가 되는 것입니다. 삼보가 한데 합쳐서 일심(一心)이 되는 것입니다. ‘삼보’ 하면 과거 현재 미래를 한데 합친 것이 삼보입니다. 그래서 일심으로써 꼭 알아야 될 것은 ‘큰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보배가 바로 나한테 있다. 그래서 삼보가 내 한마음 속에 있으니 부처님과 일체 만물만생이 어찌 따로 떨어져 있으랴. 한도량에 있는 것이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육신, 육바라밀이라고 해도 됩니다. 육신에서 나오는 여섯 가지에 관한 건을 모두 따로따로 할 양으로 애를 쓰면 얼마나 더디겠습니까? 보시라든가 지계라든가 인욕이라든가 정진, 선정 이런 문제를 다 각각으로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멀겠습니까. 그러나 내 몸뚱이 속에는 그 여섯 가지뿐만 아니라 천차만별로 있습니다. 왜 여섯 가지뿐이겠습니까. 여섯 가지를 정해 놓는다면 더 이상은 못 합니다.
그러니까 아예 스스로 한마음에다 모든 거를, 선도 감사하게 놓고 악도 그렇게, ‘악하게 되는 것도 그 속에서 나온 거니까 선하게 나오는 것도 너다.’ 하고 선과 악을 다 놨을 때 비로소 스스로 생산이 돼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거는 콩이나 팥에다 목적을 두는 게 아닙니다. 콩과 팥, 일체를 모두 다 한데 합쳐서 생산이 돼서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보현도 되고, 법신도 되고, 부처도 되고, 관세음도 되고, 지장도 되고, 칠성도 되고, 아촉도 되고, 아미타도 되고, 미륵도 되고 전부 다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한마음 속의 자생 중생들에게 항복을 받아야, 조복을 받아야 일체 중생들을 나 아님 없이 조복을 받게 할 수 있느니라.” 이러셨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색이 즉 공이다. 공이 즉 색이니라. 그러니 둘이 아니다. 그대로 더불어 사는 한 공체(共體)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심(共心)이자 공체(共體)이자 공용(共用)이자 바로 공식(共食)이자 공생(共生) 아닙니까? 이것이 ‘나’라고 내놓을 건덕지가 하나도 없어요. ‘나’라고 내놨다 하면 손해가 가요.
여기 수만 명이 이렇게 한데 합쳐서 살고 있는데, 그걸 바다라고 합시다. 바다가 이거는 내 물이고, 그거는 내 물이고, 저거는 내 물이라고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물을 떠 가도 ‘아, 떠 가나 보다.’ 할 뿐이죠, 줄지 않고 더불어 살기 때문에, 바다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바다라면 내 마음을 한 번 주고 두 번 준다 해도, 상대방이 떠 간다 하더라도 줄지 않는 거다 이겁니다. 마음이 바다와 같아서, 더불어 살기 때문에, 공체이기 때문에, 공심이기 때문에, 공생이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그 공생으로 살고 공체로 사는 그 속에서 어떻게 ‘내’가 업이 있고 번뇌가 있고 병고가 있고, 가난이 붙고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얘깁니다.
이건 여러분이 신기하고 묘한 그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어요. 내가 살아오던 관습에 의해서 이날은 손이 있으니까 이사를 못 간다고 생각을 하면 진짜 손이 있게 되고, 이 세상에 태어날 때와 돌아가는 날, 이사 가서 좋은 날을 내가 택하면 그냥 법이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대로 법이 됩니다. 그건 왜냐하면 공동체이기 때문이에요. 혼자 살 수 없어요. 이 몸뚱이도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같이 살고 있죠.
그런데 나라고 하고, 내가 산다고 하고, 내가 벌었다 하고, 내가 즐겁다고 하고, 내가 고통이라고 한다면 고(苦)가 있는 대로 착착 붙죠. ‘고’ 하면 수천 가지가 한데 합쳐진 거예요. 고통이라는 건 새록새록이 많은 거죠. 그 고통을 혼자 짊어지게 되면 그냥 혼자 나타나는 거죠, 그 고통이 말도 할 수 없이. 그러나 더불어 같이하기 때문에 주인공이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같이 사는 생명들인데 내가 혼자 산단 말은 안 해도, 내가 혼자 사는 것처럼 하고, 내가 산다고 하고, 잘했어도 자기가 했고 못했어도 그렇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모두? 그런데 그거를 바꿔 보세요. ‘으응, 더불어 같이 이렇게 했구나.’ 이렇게요.
그러니까 자기 몸뚱이도 빼놓지 않고 주인공이에요! 더불어 같이한 거니까 같이한 그 속에서 그것을 해결을 해야죠? 자기 혼자가 아니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같이 더불어 살고 있는 동체 속에서 그렇게 했으니까 같이 해결해야죠, 네? 같이 잘못했으면 같이 해결을 해야지, 내가 혼자 했다고 이렇게 꺼덕거리니까 ‘흥, 너 혼자 했으면 너 혼자 맡아라.’ 이러곤 그냥 다 안겨진단 말입니다. 안겨지니까 꼭 고통을 받아야죠.
어떤 사람이 차를 타고 갔는데 꼭 구를 것만 같고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더래요. 그러는데 무슨 마음이 생겼느냐 하면 ‘더불어 같이 주인공이, 그렇게 자빠지게 하는 것도 너니까 괜찮게 하는 것도 너다. 에이그, 죽이든 살리든 네가 알아서 해!’ 하고 그냥 타고 가다 보니까, 정말 이 차가, 그러니까 운전수가 술을 먹고 운전을 하다가 그냥 내리굴렀대요. 굴러서 차는 바스러졌는데 운전수도, 자기도, 또 같이 탄 사람도 하나도 다친 데가 없이 사람은 아주 그냥 감쪽같이 멀쩡했답니다. 그냥 사람은 내던져 놓곤 차만 굴러가서 박살이 났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어나서는 아까 했던 생각이 기억나서 웃었다는 겁니다. ‘야, 사람은 내던져 놓고 차만 갖다가 박아 놨네.’ 이러구요. 그러고 이차로는 감사하다고 생각을 했대요.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그랬죠? 우리도 이 마음이, 그 의식 자체가 하나로 뭉쳐야 해결을 해도 그냥 해결을 하지, 내가 개별적인 생각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한번 침착하게, 자기 몸뚱이를 놓고 생각을 해 보세요. 자기 몸뚱이가 위성이기도 하고, 블랙홀이기도 하고, 우주이기도 합니다. 내 하나를 터득을 하면요, 다 터득이 돼요.
우리가 결국은 육신이 있기 때문에 육바라밀이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삼보가 있고 삼심이 있어서, 삼심이 일심이 되고 이러는 거예요. 과거에도 내가 살았고 현재에도 내가 살고 미래에도 내가 살 거예요. 그러니 이것을 밤과 낮에 비유해서, 밤이면 저승이고 과거, 낮이면 이승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저승과 이승이 어떻게 둘로 나누어졌을까? 밤에 잠을 자야 낮에 일을 하고, 그러니까 밤이 오는 것이 바로 과거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낮이 오는 것이 현실이에요. 그래서 밤과 낮이 한데 합쳐져야만이 생과 사도 같이 구르면서 이게 진리의 끈이 되죠. 진리의 끈이 됨으로써 그냥 끝없이 돌아가듯이요.
그래서 조금 아까 무엇을 어떻게 했든 무엇을 들었든, 모두 벌써 과거로 돼 버렸어요. 과거가 돼 버렸다구요. 그런데 과거로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현실에 있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과거는 벌써 없어졌지요. 그러니 과거도 현실이요 미래도 현실이란 말입니다. 현실의 내 한마음이 바로 삼심이요, 그것이 한데 합치면 삼보가 되고,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자기 전체 한마음으로써 더불어 같이 한가운데 삼보를 중시한다 이런 뜻입니다.
내가 없으니까 상대가 없죠. 내가 없다면 삼보도 없고, 상대도 없고, 세상도 없고 모두 없는 거죠. 그러니까 나로부터 삼보에 귀의하라, 나로부터. 나에게 삼보가 있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가만히 있다면,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다면 그때 부처인 것입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지만, 생각을 하고 움죽거리겠다 하면 법신이자 화신이고, 화신이자 보신이에요. 보신이자 또 금방 화해서 응신이 돼 버리죠.
그래서 예전 공부한 선지식들께서 ‘그대로 여여하다’ 이런 소리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니 저거니 이거니 저거니 할 거 없이 그대로, 생활 자체에 그대로 살아나가고 그대로 굴러 돌아가는 것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자 너희들의 법이고 생활이 그냥 여여하구나 이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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