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자기 탓?
본문
질문
모든 일이 다 자기 탓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생에 지은 인연에 의해서 닥치는 것인지요.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우리는 요렇게 짤막짤막하게 한 토막씩 찰나찰나 넘어가니깐 그렇지 시간과 공간이 없다면 바로 일생, 칠십 평생 팔십 평생 넘어가는 이 때에 우리는 그 물에서 떴다가 그 물에 가라앉을 뿐입니다. 가라앉았다 뜨고 떴다가 가라앉고 이렇게 하는 것밖에는, 인생이 그런 거밖에는 안 됩니다. 떴다 가라앉고 떴다 가라앉고 하는 그런 동안에 우리가 일평생 살면서 어저께 저질러 놓은 일 때문에 오늘까지 울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거를 비유해 보십시오. 내가 잘되겠다고 일을 했는데 그것이 안돼 버리고 망했을 때 그렇게 자기가 저질러 놨기 때문에, 엊그저께 저질러 놓은 일이 오늘에 닥치니까 막 울죠? 또는 이렇게 망할 줄은 몰랐는데 망했다고 남을 원망하고 저 사람으로 인해서 이렇게 망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가 업을 지어 놓고 자기가 받는 거죠. 그것을 업이라고 합니다. 진화를 해서 우리가 모습을 바꾼다고 하는 창조력은 우리가 금방, 요거를 이해를 해 보십시오.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어머니를 만났을 때에 어떠한 생각이 듭디까? 어머니 만났을 때 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딸의 행동과 딸로서 말이 나갑니다. 남편을 만났을 때는 남편에 의해서 말이 나가고 행동이 나가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럼 어머니 만날 때하고 남편 만날 때하고 찰나에, 내 마음은 전체적인 마음뿐만 아니라 그 행까지도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 생활 불교로서 이끌어 가려니까 이렇게 내가 말을 하지 않고는 안 되겠어서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에 뛰어든 것입니다. 옛 선사들처럼 낚싯밥을 던져서 하기보다는 그냥 여러분하고 뛰어들어서 같이 죽을 쑤든지 밥을 쑤든지 같이 앉아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칠십 평생 팔십 평생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어머니 만날 때의 그 모습하고 남편을 만났을 때 그 모습은 변화가 돼 가는 것입니다. 찰나여서 자기 자신들은 변한 거를 모르지만 시계 초침 하나 똑똑똑똑 가는 대로 변화돼 가는 것입니다. 금방 엄청나게 변화가 돼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변화된 걸 모르고 갈 뿐입니다. 찰나찰나 나투고 가는 것이죠. 화해서 자꾸 변화되어 가는 것이죠.
그런데 어머니 만날 때에 말과 행과 마음이 동시에 융합이 돼서 무심으로 그냥 무행을 했는데, 그러면 그렇게 한 자체와 칠십 평생이나 팔십 평생을 살다가 죽어서 또다시 이 세상에 나는 것이 순간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칠십 평생, 팔십 평생, 백 살을 살다가 죽든지 애 적에 죽었든지, 죽어서 다시 태어나서 인연 따라서 또 만났다 할지라도 그 순간, 어머니 만날 때의, 즉 말하자면 그 삼합이 동시에 움죽거려서 자기가 행을 하는 거, 남편 만날 때에 또다시 그것이 홀딱 바뀌어서 아내로서의 생각이 들고, 딸로서의 생각이 들거나 며느리로서의 생각이 드는 거, 며느리로 살다가 금방 아내로 살았어. 이것을 바로 윤회라고도 하고 인연법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을 한번 축소해서 생각을 해 보시도록 하고요, 모르시면.
우리가 그런 게 존재하느냐고 하는데 진리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자기가 저질러 놓은 것은 자기가 받게 마련이니깐요. 지혜가 있다면 다 놓을 수 있고 굴릴 수 있고, 지혜가 없다면 바늘구멍도 안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좁은 마음은 그걸 능가할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이, 어머니 만날 때도 내가 만났다고 하고, 남편 만날 때도 내가 만났다고 합니다. 벌써 시계 초가 하나하나 갈 때마다 내가 변화된 거를 모르고 있을 뿐 벌써 딸이 됐다가 남의 집 며느리가 됐다가 금방 남의 집 남편이 된 그 사이가 찰나인데….
그것을 우리가 가만히 생각을 해 본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또 한 번 다른 모습을 가지고 나와서 사는 걸로 비교를 해 보십시오. 축소를 하면 그게 되고, 만약에 대의적으로 따진다면 죽고 또다시 모습을 가지고 나와서 사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진화나 또는 모습의 진화가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에 이렇게 자유스럽게, 아까 얘기했듯 어머니 만날 때의 마음과 아버지 만날 때의 마음, 동생 만날 때의 마음이 이렇게 아주 묘하게 자유스럽게 무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깐 우리는 90%가 부처라고 합니다. 왜 90%가 부처인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벌써 부처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자기 부처를 우습게 생각하고 남의 부처만 부처인 줄 알고 위대한 것만 위대하게 보고 낮은 건 낮게 보고서 아상을 높이고 권세를 부리고 이러는 까닭에 우리들은 고가 많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음이 그래서지요.
마음의 생동력 있는 능력, 그 능력이 공해서 공심으로서 공생을 하고 있으니 우리가 때에 따라서 조그만 일이든지 큰 일이든지 다양하게 능력을 쓸 때에 항상 우주 천하 삼천대천세계의 생명들의 능력은 바로 내가 한생각 낼 때에 같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같이 들어와서 수많은 능력이 한데 한마음에 응시되니 한생각에 우주 천하가 들리고 말죠.
그런데 우리가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물건이 있고 여러 분과 같이 드는 물건이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독불장군으로서 그냥 ‘내가 했고, 내가 살고, 내가 모든 걸 줬고, 내 것이고’ 이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것, 이 물건 이 색(色)이, 내 몸 육신이 나라고 산다면 그렇게 나라고 했으니 수많은 생명의 능력은 한꺼번에 한마음에 들어 주지 않습니다. 무량한 발전소, 즉 비유해서 자동적으로 돼 있는 자가발전소가 있다면 자유스럽게 남에게도 전기를 넣어 줄 수 있죠. 항상 들어오는 불이기 때문에 꺼지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자유스럽게 스위치를 가지고 쓸 수가 있는 건데 그거를 못 쓰게 되는 원인도 바로, 무량한 자가발전소를 모르고 전기가 들어온 것만 가지고 내 것이라고 하니까 그런 겁니다. 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데 그걸 모르니까 전기를 내가 자유스럽게 켤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그 자가발전소가 바로 나라면 내가 자유스럽게 할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좀 널리 지혜 있게 써서 내 육신이 생기고부터 이 세상이 모두 공한 거를 알았고 나로부터 전체가 공한 거를 알았고 내가 이 세상에 난 것이 태초요, 내가 난 것이 바로 화두니까 그 화두로 인해서 이 세상이 있고 세상에 진리가 있고 세상의 진리를 내가 탐구하고 깨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바로 제 놈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제 속에서 모든 것이 나오는 거, 그 자리에다가 믿고 일임해 놓지 않는다면 천차만별로 된 부처님의 그 광대무변한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을 내가 헤아릴 줄 모른다면 부처님은 아마 알지도 못하고 맛도 못 보고 보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가 하는 일마다 ‘아, 이게 공했으니까 내 주인공이 하는 거로구나. 내 육신과 더불어 같이 공했으니까 주인공이야. 즉 내가 주인공이지. 모두 내가 한 거 나한테다 놔야지.’ 하고서 모든 걸 놓을 때에 홀연히 스스로 단맛이든 쓴맛이든 다 합친 능력이 스스로서 나와서 자기가 그 생명수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 이전글얼마 전 여객선을 탔는데 23.12.20
- 다음글생로병사가 실감 납니다 23.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