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과 졸음이 극복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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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루 한 시간 정진의 시간을 갖고 나름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이 망상과 졸음을 극복할 수가 없어 죽을 지경입니다. 옛날 선지식들은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턱 밑에 송곳을 놓고 정진하기도 했다지요. 저도 이런 방편들을 좀 써야 할지, 도움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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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가 정신적인 50%의 맛을 모른다면 물질계의 50%에서 허덕거리다가 꺼져 버립니다. 영원한 것이 뭔지 허망한 것이 뭔지 그것조차도 가늠 못 하고 갈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몸이 살아 계실 때에 모든 상대가 있고 인연의 법칙이 있고, 이런 반면에 공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몸이 없어지면 더하고 덜함도 없기 때문에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선지식들께서 망상과 졸음 그 두 가지를 상당히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관할 때는 반드시 졸지를 말아야 하고 망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죠. 그런데 망상과 졸음을 얘기한다면, 그 졸리고 망상이 난다는 걸림에 걸려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잔다 깬다, 잔다 자지 않는다’가 붙어서는 선(禪)에 즉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망상이다, 망상이 아니다’라는 게 붙으면 거기 직결되지 못합니다.
물론 초발심 때는 자경문도 읽고 계율도 엄하게 지켜야 하고 또 망상도 물리치고 졸음도 물리쳐야 되겠죠.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가 살아나가는 관습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옛 조사들의 뒷발자취를 쫓아가도 아니 되고, 못났든 잘났든 자기 발자취가 얼마만큼이나 컸나, 한 짝이 크고 한 짝이 작으니까 한 짝을 얼마나 키웠나 하는 것입니다.
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금 불바퀴는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네 생활도 다 돌아가고 있습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색과 공은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기를 처음부터 졸음을 금하면서 칼을 목에다 대고 하느니보다 모든 것이, 자는 것도 깨는 것도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몽땅 생활 자체가 그대로 참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 이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나로 인해서 세상이 벌어진 거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러면 나로부터 벌어졌으니까 나로부터 알아야 하지 않나? ‘졸린다, 졸리지 않다, 졸음을 쫓아야겠다’ 하는 것도 거기 놓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직결로 들어가는 코스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함으로써 이 ‘나’라는 혹성의 본래 자성불은 그대로 둘이 아니게 얽혀서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감응이 되고 생각이 깊어집니다.
이 말을 또 해야 되겠군요. 말하자면 ‘부모에게 몸을 받는다’ 하는 것은 집만 받은 겁니다. 자기 나오기 이전 영혼과 나오기 이전에 살 때에 악업 선업을 지은 그 인연들이 전부 내 몸속에 들어 있습니다. 몸속으로 한데 부합이 됩니다. 부합이 되면은, 그 안에 있는 중생들은 잘되고 잘못되고 그걸 모릅니다. 악업 짓고 선업 지은 그 인연에 따라서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하게 그것만이 아주 입력이 돼서 현실로 착착 나옵니다, 현실로. 그것들이 자꾸 나오니까 사람도 죽이게 하고, 강도질도 서슴지 않고 하게 되고, 또는 선한 일도 하게 하고, 욕도 하게 하고, 화도 나게 하고, 병도 오게 하고, 애고도 오게 하고,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다가오는 그 모든 고를 말입니다.
그러면은 그거를 어떻게 해야 녹일 수 있는가? 이 주인공에 놓는 것을 용광로라고도 하고, 불바퀴에 닿기만 하면 탄다고도 합니다. 그것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거기서 일어나는 대로 수없이 일어나는 마음에 왜 간섭을 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깐 일어나는 대로, 모든 거를 그 불바퀴에 놔라 이겁니다.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니까 주인공입니다. 모든 것이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니까 ‘주인공에서 해결할 수 있다, 주인공에서 낫게 할 수 있다, 주인공에서 이끌어 줄 수 있다, 나 아닌 나가 있다고 깨닫게 하는 것도 주인공이다’ 하고 진실하게 구하고 진실하게 내가 있다는 소식을 가져오게 하는 거지, 이것이 벌써 졸린다 하면 졸리지 않은 게 따라붙고 망상이다 하면 망상이 아닌 것이 따라붙죠.
이러니깐 수박을 놓고선 아무리 이리저리 굴려 봐도 도무지 그 수박의 맛이 나오지 않고, 첫째로 과거의 씨가 현실의 씨가 됐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씨를 찾으려고 자꾸 과거로만 돌아가려고 하는 그런 현상만 생기는 겁니다. 이 모두가 생각해 보면 사람의 한생각에 몰락 벗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돈오다 점수다 할 것이 없이 말입니다. 그것도 이름일 뿐이지만.
여러분께서 스스로 나와 내가 상봉을 해야 그때부터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에 초발심에도 죽어야 하고, 둘째도 죽어야 하고, 셋째도 죽어야 한다. 내가 항상 그런 말을 하죠. 내 집에 전화부터 놔야 남의 집에서 전화도 오고 남의 집으로 전화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해서 통하는 것이지 그럭하지 않는다면, 아니 내 집에 전화도 놓지 않고 전화 올 때를 바라고 전화할 것을 원하고 있으면 그게 됩니까? 천년만년 있어도 안 됩니다.
내가 어두우면 불을 켜는 법이요, 또는 없어서 고생을 하면 일을 하는 법이요, 안 그렇습니까? 졸리면 자는 법이요, 배고프면 먹는 법이요, 똥이 마려우면 소통이 돼야 하니까 똥을 누는 법이요. 거기 무슨 이유가 붙습니까? ‘망상이다, 망상이 아니다’라는 게 붙으면 직결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망상이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망상이라고 생각하면 망상일 것이고, 망상이 아니라고, 즉 말하자면 ‘망상이 없으면 아, 우리가 목석이지 발전이 없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망상이 아닙니다. 모두가 발전으로서의 계기를 갖는 거죠. 그러니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까 마음도 그렇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갈 수 있고, 발전할 수 있고, 창조력을 기를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돼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망상이다 뭐다 하는 것도 모든 것을 생각나는 대로, 즉 말하자면 좌선이다, 입선이다, 와선이다, 행선이다 하는 것을 초월해서, 일할 때나 잘 때나 누웠을 때나 앉았을 때나 모든 걸 막론해 놓고 ‘그놈이 있으니까 하지. 들이고 내고 하는 놈이 그놈이다.’ ‘그놈은 또 무엇인가?’ 하지 말고 ‘그놈이 있다’라는 거를 전제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게 ‘그놈이 무엇인고?’ 하는 생각을 하면은 ‘무엇인가?’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맛도 못 보고 작년 씨가 올로 이렇게 온 거를 모르고, 작년 씨 찾다가 해 다 보내죠. 그러니까 모든 것을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서 예전에 선조들께서는 진실하게 일념으로 구했습니다. 진실한 일념, 진실한 일념으로 구해야 구해지고, 진실한 일념으로 구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자체에 있다는 그 소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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