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115_1987년 5월 3일 그릇을 탕탕 비우는 공부
본문
질문: 근래에 보면 신문에도 많이 나오는데, 대개 큰스님들도 많이 그러시고 마음을 비우라는 소리를 많이 합니다, 마음을 비우라고. 또 우리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 보면 마음을 비우고 들어가자 하는데 사실 마음을 비우자는 것은 욕심을 버리자는 얘긴데 우리 대행 스님의 설법을 들으면 마음을 비울 수가 있는데, 문 밖만 딱 나가서 물질만 딱 보면 마음을 비울 수 없는 상태가 되는데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말씀 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답변: 여러분이 지금요, 마음을 비우라 하기 이전에 아주 탕탕 비어 있습니다. 그런 걸 왜 모르십니까? 본래 비워져 있습니다. 돈을 억만금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건 가진 게 아닙니다. 비었습니다. 자기의 추에 의해서 그냥 돌아갈 뿐입니다, 재산도 모두가. 여여하게 쓰십시오. 여여하게 사랑하고 여여하게 쓰시고 여여하게 그냥 하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처가 돼 봤어야, 그것도 이름해서입니다. ‘부처가 돼 봐야 보살이 될 줄 알고, 보살이 될 줄 알아야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다’라는 얘깁니다. 이것이 참사람이요, 이름해서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신도 자기요, 보살도 자기요, 부처도 자기요, 중생도 자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자기의 태초의 모습이…,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자기 이 오장육부의 세포를 타고 자기의 그 태초의 모습들이 지금 자기 속에 우글우글하고 있습니다, 갖은 각색으로 하고. 그런데 자기가 선장으로서의 한생각을 내면서 들입다 지금 여여하게 뱃놀이를 하고 가는데 “흥!” 소리를 못 지르나마, 노래는 하지 못하나마 왜 여여하게 가지 못합니까?
그러니 여러분들이 그 “놔라” 하기 이전에 놔져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놓지 않고 있다면 지금 저기 생각에 의해서 그냥 잔뜩 끼고 있어서 그렇지, 그건 여러분의 탓이에요. 그냥 돼 있는 건 여기 지금 오실 때에도 그 발자취가 없는 겁니다. 그 발자취는 금이 아니고 보석이 아니고 돈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무심하게 왔기 때문에 그냥 없는 거지, 아마 발짝 하나 딛는 데 금은보화가 10억씩 붙어있다고 그런다면 ‘아휴! 한 걸음에 10억씩 붙어있는데 내가 이거를…!’ 이럴 겁니다. 그러나 이거는 뭐, 하나도 돈 내는 것도 없고 돈 붙는 것도 없고 뭐 하나도 이익이 없으니까 그냥 태만하게 그냥 왔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아나가는 것도 태연하게 그렇게 가십시오. 여러분들이 집에 들어가실 때 신발을 벗고 들어가실 때 신발을 내가 벗고 들어간다는 생각이 있이 들어가십니까, 신발을 벗는다는 생각이 없이 들어가시는 겁니까? 똥 누러 갔을 때 똥을 누러 간다고 생각을 하고 갑니까, 그렇지 않으면 똥만 마려우면 그냥 뛰어 들어갑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똥 버리는 건 아깝지 않고 금 버리는 건 아깝거든요. 마음이 이렇게 괴상망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요, 내가 나를 한번 봅니다. 돈이 백만 원이 들어왔든 천 원이 있든 그것은 한 개도 없습니다. 여러분들한테 한 개도 받은 예도 없고 준 예도 없습니다. 한 예도 없고 또 여러분들이 나로 인해서 한 예도 없습니다. 주고받은 게 없어요. 그건 왜 그러냐. 이 집이 이렇게 절이 있어도 이게 바로 내 것만이 아니고 여러분들과 동시에 나와 같이 여래의 집이기 때문에, 여래의 집이기 때문에 나는 욕심 부릴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이거야,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들이 가정을 가지고 있고 내 자식과 아내와 다 같이 이렇게 있으면서도 그것은 바로 동시에 식구들 것이기 때문에 내 거라고만 할 수 없으니 그냥 놓으시고 사세요, 그냥 그대로.
글쎄, 여러분들 아버지로서 아버지(로서)의 몸이 자기 몸입니까? 걔네들의 바로 아버지지. 왜 자기 겁니까? 자기가 어디 있습니까? 그 부인의 바로 남편이고 그 자식들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아버지가 될 때 자기라고 하겠습니까, 남편이 될 때 자기라고 하겠습니까? 똑바로들 말씀해 보십시오. 어떤 거 될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나. 그렇기 때문에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거라고 할 것도 없고 남의 거라고 할 것도 없는 그 자리에서 내가 여여하게 그냥, 벌게 되면 벌고 못 벌게 되면 못 벌고 이러는 반면에 내가 그대로, 버는 것도 못 버는 것도 그냥 그대로, 그대로입니다.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쓸 때 쓰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 우주 천하가 다 내 거라면 무엇 때문에 그걸 짊어지고 다닙니까? 짊어지고 안 다녀도 그냥 허허지 늘어진 게 바로 ‘나’고 내 생명이고 내 것이고 내 아님이 없고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도리를 꼭 하십시오 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자아내려면 자기 주인공을 믿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왜 자기를 낮게 생각을 합니까? 낮게 생각도 말고 높이 생각도 하지 마세요.
석존께서 어느 신도가 아프다고 누웠는데 그 신도가 석존을 뵙고 싶어서 무척 아프면서도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도가 스님한테 가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 밑의 제자들더러요. “우리 고을에 아무 데에 사는 아무개는 죽을 날이 며칠 안 남게 이렇게 아파서 누웠으면서도 한 번만 뵙고선 갔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이렇게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까 “그러면 가야지.” 하고서 일어나서 가셨습니다. 가셨는데 이 아픈 사람이 석존이 들어오시는데 어떻게 누워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일어나려고 하니까 드러누우라고 했습니다. “이 육신은 드러누웠으나 앉았으나 일어나나 그것은 상관이 없다. 단, 네 마음이 그토록 그렇다면 벌써 일어나서 그렇게 반겨 줄 수 있는 그 진정한 진실한 마음이 있노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고 “절을 삼 배 했느니라.” 하거든요. 그 뜻이 뭐겠습니까? 우리네 마음이 말입니다,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네 마음이 자기를 구덩이에다 넣을 수도 있고 구덩이에서 나오게 할 수도 있는 그런 묘법을 가지고 있답니다.
여러분들이 그 말만 들었지 이론으로…, 정말이지 저보다도 이 세상에 모두들 유명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말로 이론으로써 참, 무불통지하셔서 말을 참 잘하신다 하더라도 못하는 ‘나’만 못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 뜻을 아십시오. 열 번, 백 번, 만 번 말을 잘한다 해도, 또 물질적으로나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율법을 지킨다 해도, 이 무(無)의 두루 법인, 무(無)의 세계의 두루 법은 이건 따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 두루 법은, 두루 모습은 무궁무진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행하기가 어려운 거지, 한 번 행할 때는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행할 때에 한 주장자를 탁, 주장자가 동그랗게 말려서 아주 가지고 다니는 사이 없이 가지고 다닐 때 주장자가 한 번 탁…, 이렇게 용도에 따라서 딱 들었다 하면 쭉 펴지면서 소리가 요란하게 날 때는 우주간 법계에서 다 그 소리를 듣고 다 같이 호응을 해 준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들이 몰라서는 아니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 법이.
우리 지금 조그마한 반쪽 된 나라에서도 그렇게 가난하게 이렇게 살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이 부자라면 ‘허허’ 웃으면서, 요지로다가 나물 먹고도 물 마시고 이빨 쑤시듯, 반쪽 나라에서 살면서도 이렇게 여여하고 좋을 수가 없는 것이 바로 그 능력입니다.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갈 수 있고, 손 없는 손이 두루 할 수 있고, 발 없는 발이 길 없는 길을 두루 할 수가 있는 이 묘법을 가지고 있다면 구태여 그렇게 어려웁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 우리가 지금 율법으로써, 또 우리가 지금 현재 물질적인 생활로써, 물질적인 과학으로써, 물질적인 모든 공업으로써 이 세상 모두 살아나가는 문제, 경제 이런 문제, 이런 것도 모두가 포함해서 한 추에 모두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거짓말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그렇게 철두철명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 도리를 아신다면 참 자비하기도 하지만 사랑, 값싼 사랑이 아닙니다. 이건 더럽고 깨끗한 걸 한데 합친 게 자비니까. 이렇게 자비하고 묘하고 이렇게 당당한 도리가 어디 있을까 하고, 이 세상을 다 바꾼대도 바꿀 수 없는 이런 도리가 바로 여기에, 나한테 있구나 하는 걸 아실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까 내 말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마음…, 이론적인 아는 것, 하늘을 뚫는 아는 게 있다 하더라도, 말이 있다 하더라도 다 자기는 그 참자기 안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한 문으로 들었다가 한 문에서 나오는 거니 모든 것은 그 나오는 대로 거기에 다시 놓으십시오. 그러면 빈 카세트가 될 겁니다. 바로 이것이 비우는 공부며 아주 탕탕 그릇을 비우는 공부입니다. 비워야 바로 우리는 항상 집어먹을 수 있고, 그저 닥치는 대로 넣을 수 있고, 항상 비어 있기 때문에…. 그러니 이 소리는 누가 모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다 아실 테죠.
아까 정락 스님도 효도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러셨지만, 우리가 옛날에 그렇게 길게 늘여서 하는 그 효도, 그거보다는 지금은 빠르게 효도하는 법이 바로 지금 우리의 마음 공부하는 이 도리가 유무를 같이 균등을 잡아서 다 해나갈 수 있는 (도리입니다.) 따님이 저기를 가고 또 부모가 어디를 가고 그랬을 때에 앉아서 모시고 갈 수 있는, 내가 갈 수 없는, 모시고 갈 수 없는 것, 또 데리고 갈 수 없는 이러한 문제가 있더라도 그냥 남이 볼 때는 혼자 가는 거지만 바로 일체제불이 다 같이 할 수 있는, 일체제불이 한마음에 들어서 같이 보신이 보하고 가듯 이렇게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여러분들이 기르신다면 아마 한국에서 외국으로 무역을 해도 손색이 없고, 또 어느 회사를 한대도 손색이 없고 정치를 한대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모든 게 앉아서 무(無)의 세계에서 모습 없는 모습으로써 다 해 놓으면서 거죽으로는 보이는 데서 다 하고 이렇게 하면 안 보이는 데서 거죽으로, 보이는 데로 자기의 능률이 그대로 나오고 나오는 대로의 씀씀이를 또 다 다양하게 쓰고, 또 들이고 쓰고 내고 하는 그러한 도리가 바로 우리 생활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도가 별로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생활이 도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재밌는 질문도 서로 또 하시면 나도 또 배울 점이 있을 테죠. 여러분들하고 저하고 이렇게 같은 한자리에 있을 때는 저도 많이 배우는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공부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저도 같이 행 한 번 하는 데에 우리 목마르면 물 마실 수 있는 이러한…, 이 물 한 모금 마시고 한생각에 그저, 사이 없이 저 외국에도 빛보다 더 빠르게 갈 수 있고, 올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이것이 참 능수능란하다면 어디 군사가 없겠습니까?
죽은 사람도 군사로…, 아니, 나 그전에 보니까요, 이렇게 앉았으면 얘기가 길어져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죽은 군인들을 보니까 다리가 떨어진 사람은 다리가 떨어졌다고 알고 있고 팔이 부러진 사람은 팔이 부러졌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생각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글쎄. 그러니까 자기가…, 영령이 말입니다, 이게 떨어졌다고 생각을 하니까 싸움터에 나가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체가 없다면, 체가 없는 건 무슨 팔이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가 뭐가 있습니까? 마음이 말입니다. 육신이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왜 마음이 떨어집니까? 팔을, 발을 말입니다, 수만 개를 달으려 해도 달 수가 있지 않습니까? 몸뚱이는 없이 팔만, 손만 그냥 만들어도 수만 개를 만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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