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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법문_169_1992년 5월 24일 내가 죽어서 나를 발견하는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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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1(남): 큰스님, 감사합니다. 저희, 분별심 있는 저희로서는 큰스님이 저희 대구지원에 오셔서 좋은 법문을 해 주심으로써 너무나 감사한 마음과 뭐 말로 표현을 다 못 드리겠습니다. 제가 질문을 네 가지를 준비를 했습니다만 큰스님 법문 중에 그 둘이 아닌 도리는 누누이 또 말씀하셔 가지고 제가 통?? 빼겠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삭제)
첫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견성 또는 각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찾는 주인공을 찾는 것과 같은지요? 그리고 육조단경에는 견성을 단박 깨침, 그러니까 돈오돈수라 하셨는데 이 주인공은 어느 순간에 찾아오는 것인지요.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큰스님: 주인공 이 자체가, 즉 말하자면 전부 공생으로서 공용을 하고 돌아가는 이 자체를, 즉 말하자면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니까 공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의 중심이자, 모두가 천 가지 만 가지 그 마음으로부터 나와 돌아가니까 공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탈랜트들이 주인공을 내세워서 하면은 주인공은 죽는 법이 없어요, 영화에도. 그렇듯이 주인공이라는 것은 죽고 사는 게 없습니다. 그대로, 생멸에 대해서도 죽고 사는 게 없단 얘깁니다. 영원한 겁니다. 지금 주인공 찾는 것이 바로 자기를 끌고 다니는, 수억겁 광년 전서부터 끌고 다니는 자기 근본적인 주인 자기랍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냥 그대로죠. 
그래서 그럼, 돈오, 돈수가 다르냐? 돈오가 다르고 점수가 다르냐? 그게 아닙니다. 학과 도와 다르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도(道) 교(敎)는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이 모두가, 점수는 우리가 탑을 쌓으려면 하나하나 벽돌을 갖다 놓습니다, 돌을. 그 돌을 갖다 놓는 과정을 점수라고 한다면 탑이 딱 돼서 봉오라지가 딱 올라갈 때는 돈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탑 쌓는 데는 둘이 아니다는 얘깁니다, 모두가. 
우리 예를 들어서 그렇게 아시면, 우리가 지금 한마음에, 지금 우리 맷돌에도 심봉이 있습니다. 심봉을 끼워야, 아래 위 심봉을 끼워야 물질이 들어가서 갈리죠? 그래서 물질과 맷돌과 물과 모든 인연에 따라서 그게 합세가 돼 가지고 돌아가서 그게 갈려 나오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 여러 가지가 그렇게 해서 나오듯이 심봉은 움죽거리질 않아요. 심봉은 움죽거리지 않고 맷돌만 괜히 돌아가죠. 그러는데도 물질이 다 갈려 나온단 말입니다. 그렇듯이 그 심봉이라는 것은 힘만 가하지, 힘을 가하지 이 맷돌과 같이 돌아가는 법이 없어요. 
그와 같이 우리의 주인공은 힘만 가하는 거지, 우리 마음을 내서 돌아가는 거는 맷돌 돌아가듯 한다, 우리 이 몸뚱이도. 그래서 마음을 내서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고 이거를 해야겠다 하고서는 하는 게 맷돌에 꼭 물건 넣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물건을 넣어서 거기서 갈려 나올 때를 기다리면서 이게, 넣고 또 살림살이를 이렇게 하고 가죠. 그런데도 그 심봉은 꿈쩍도 안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영원한 자기의 참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진실히 발견하라. 본래 없는 게 아니라, 찾는 게 아니고 본래 있는 거니까 발견하라 이거죠. 그 묻는 말에 대답이나 제대로 했습니까? 

질문1(남): 감사합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드리겠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저희에게 세 번 죽어야 하는 도리를 말씀하셨는데 저희는 한 번 죽을 때의 변화됨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주인공 공부를 하여 단계적으로 죽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그 단계조차도 그냥 하나로 들어가야 되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내가 항상 얘기하죠. 나를 발견할 양으로 모든 걸 거기다 놓고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모든 걸 한 군데다 놓고 내가 고정된 게 없이 그렇게 돌아가니까, 생각을 해 보세요. 내가 쑥 없어지죠? 아버지로 남편으로 뭐, 이걸로 저걸로다가, 한마음의 심봉으로다가 모든 게 매사 게 돌아가니까 그 심봉을 따진다면 심봉은 어느 편에 설 수도 없으니까 없는 거죠?  심봉은 어느 편에 설 수도 없죠. 그냥 돌아가는 맷돌에 의해서 그냥 우뚝 섰으니까. 어느 편에 선 곳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바로 거기까지 침투할 때까지 죽어야 한다. 그 어떤 걸로 세울 수 없는 것이, 그 도리를 아는 것이 죽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죽어서 나를 발견하고’ 하는 겁니다. 
또 두 번째, 내가 죽어서 둘 아닌 도리를 알고 또 세 번째, 내가 죽어서 둘 아니게 나투는 거. 왜, 법신 보신 응신으로서 모든 그 내 아님이 없이 나투는…. 부처님께서 돼지를 건지시려니까 응신이 돼 가지고 돼지한테로 들어가 가지고 너무 오래 있으니까 물들까 봐 걱정이 된다고 그런 말도 있죠. 그래서 이 돼지를 건지려면 돼지가 돼서 들어가야 저항력을 느끼지 않지, 돼지가 아니라 사람이 들어가는 걸로 돼지가 알면 저항력을 느껴서 못 받아들이죠. 뱀도 그렇고, 짐승도 그렇고, 곤충도 그렇고, 저 목신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용신은 용신이 돼서 들어가야 용신이 재깍 받아들일 수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체 응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 죽어서 나를 발견하고 또 두 번 죽어서 나를, 둘 아닌 도리를, 모든 전체가 둘 아니게 돌아감을 알고, 세 번 죽어서 모두가 나 아님이 없이 내 아픔 아님이 없이 나투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또 세 번 죽어야 한다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을 이렇게 깨닫고 본다면, 이게 깨닫는 것도 수월합니다. 아주 편리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들은 20년 30년 40년 50년 있어도 ????이게 뭣고????? 하고선 수박을 놓고서 ????이게 뭣고????? 하고 의정을 내고 아무리 굴려 봐도 수박은 수박인데 맛을 모른다 이거야. 그냥 무조건 하고 죽고 사는 거를 버린 채 그냥 깨뜨려서 맛을 보는 것이 바로 일 단계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돈이 아니면 우리가 전체 식구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 겁내지 마세요. 겁내지 말고…, 돌 위에 세워놔도 살아요, 이 도리를 발견하면.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주인공은 어떡하든지 먹이고 입히고, 어떡하든지 자기 몸을 건강하게 이끌어서 끌고 가는 겁니다. 
잠시 산다 하더라도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면서 갈 때는 콩깍지 익어서 툭 건드리기만 해도 툭 콩이 떨어지듯 말입니다. 콩이 익지를 않으면, 여러분들이 이 마음공부를 잘 못 해서 익지를 않으면 콩깍지가 익지 않은 거와 같아서 죽을 때도 그냥 병고에 휘달리고,(삭제해주세요) 그 콩깍지 속 껍데기가 붙어서 떨어지질 않기 때문에 그냥 고생을 하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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