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_183-1992년 11월 22일 네가 알아서 이끌어 가라
본문
질문: 스님께서 방금 말씀하셨는데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시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일곱 발짝 발걸음을 옮기셨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큰스님: 육근과 육경과 육식이 한데 합치게 되면…, 죽으면 왜, 모두 칠성판이라고 그러지? 무식한 말로 칠성판을 맞이했다 이러지? 그러면 그 칠성판에다 모두, 죽은 사람들을 하죠(올려놓죠)? 그리고 또 애가 잘생겼으면, “아, 그 이목구비가 아주 뚜렷한 게 칠성판이 아주 잘생겼는데….” 이러거든.
우리가, 아까도 얘기했듯이 육근 육경 육식이 모두 종합해서 한데 합치면 십팔, 이게 되는데 십팔이 한데 합치면 그냥 이 칠성, 이 내 마음, 이 여섯…, 육신, 모든 걸 종합해서 ‘육신’ 하면 바로 육신 속에 육신이 하나가 돼 버려. 모두가 하나가 돼 버려. 그러니까 그것을 밑을 달아서 칠성이라고 그랬어, 칠성! 인간은 모두가 이목구비가 바로 칠성이야.
그래서 우리 이 생명, 이 자체 모든…, 그래서 ‘명을 길게 한다’ 그러는 것도 칠성부처를 말했고, 또 일곱 칠성을, 그 별들이, 모든 게 별들이 모두 이 지수화풍이 한데 합쳐져서 별성들이 생기고, 별성들이 생겨서 태양계를 만들고, 태양계를 만들고 또는 인간의 생명이 생기고, 생명이 생겼으면 그거와 똑같이 연결이 돼 있어. 직결이 돼 있어. 이 마음, 이 자체가 그대로 칠성이야. 그러니까 칠성만 되는 게 아니지. 아촉도 되고 아미타도 되고 미륵도 되고, 또는 지장도 되고 관세음도 되고 이렇게, 모든 게 이렇게 되니까 그걸 칠성이라고 이름을 붙여 놨을 뿐이지, 그건 이름뿐이야.
인간도 살아나가는 데에 어떻게 하나 하면 하나, 둘 하면 둘 쓸 때 둘 쓰고, 셋 쓰면 셋 쓸 때 셋 쓰고, 열을 쓸 땐 열을 쓰고, 백을 쓸 땐 백을 쓰지, 고정된 게 하나도 없잖아, 돈 쓰는 것도. 그와 같은 거기 때문에 칠성이다, 칠성이 아니다 이런 이름을 붙이지 말라 이거야.
질문: 몇 가지 더 여쭙고자 합니다. 평소에 생각하기를 선원에 다니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공부하신 곳이 지금과 똑같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울러서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집에서 어떤 일을 시켰을 때, 제가 생각하기에는 싫다는 마음을 냅니다. 그럴 때는 그 일을 꼭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요?
큰스님: 그것도 누가 주고 뺏고 하는 게 아니거든?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거야. 물건도 가공돼서 물건 하나가 나오듯이 정자 난자, 자기 영혼, 업식, 그렇게 종합돼서 한 몸뚱이가 생산이 되는데, 생산이 돼서 그런다고 해서 내가 꼭 해야 되겠다 하면 거기다 맡겨. 즉 말하자면 운전을 할 때에 운전을 해야만이 바퀴가 돌아가지, 운전대를 쥐고만 있어도 아니 돼. 그러니까 거기다 맡겨라 이거야, 운전수한테다. 내 몸뚱이를 운전수한테다 맡겨라 이거야. 맡기고 그대로 행하면 되는 거지. 그것이 법이야, 그냥.
그런데 사람에게는 악업 선업이 엄연히 몸뚱이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전자에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기한테 주어지는 거지. 이런 공부하는 것도, 우리가 세상을 다 내다봐 보라고. 금은 금대로 모여 있고 무쇠는 무쇠대로 모여 있고, 넝마는 넝마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모두가 돼 있듯이 사람도 차원대로에 그렇게 서로서로 만나게 돼 있고. 그래, 금은 금대로 금 찾아서 가게 돼 있어, 금방으로. 아무리 떨어지고 헤졌어도 말이야. 금은 금이니까.
그러니까 해야겠다, 꼭 해야겠다, 하지 말라, 해야겠다 이런다면 각자 자기네 마음에 따라서 주어지는 거지, 이 마음을 내지 못하면 계발이 되지 않고 발전이 되질 않아. 마음을 내는 게 있어야만이 발전을 하기도 하고 계발도 하고 창조력도 기르지, 창조도 해내고. 이게 과학이야. 이 생활 자체가 그대로 과학이야. 그런데 망상이라고, 생각나면 망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어. 생각을 자꾸자꾸 꼬리가 꼬리를 물고 나오는 것도 바로 자기의 수행력을 기르기 위해서 나오는 것뿐이야.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어. ‘네 몸 네가 이끌어 가는 거 알아서 이끌어 가라.’ 하고, 또는 내 마음이 그런 것도 네 놈이 내한테 마음을 그렇게 내게 했으니까 그대로 내는 거고, 또 ‘하지 말아야겠다.’ 이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자기가 자기를 또 다스리면서 나가야 되겠지. 다스려서 놓고 해야지. 그것은 이런, 이런 공부하는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자기 몸뚱이로 모든 거를 실험하고 체험해서 우리가 공부하는 거니까. 화두를 잡아서 공부한다거나 경을 읽어서 공부한다거나 또는 사대 선지식들이 간 뒤 발자취를 따라간다거나 이래서 나를 발견하는 건 아니야. 못났든 잘났든 자기가 자기를 실험하면서 바로 바깥의 일들을 전부 알게 되는 거고, 안의 일을 모르면 바깥의 일도 모르게 되는 거야. 주인 없는 집이 집이야, 그게? 집이 망가지고 말지? 주인이 있어야 집이 망가지지 않고 잘 윤택하게 살 수가 있지. 그리고 또 뭐 물어볼 게 있어?
질문자: 어떤 스님께서, 한 노파가 질문을 했는데 그 대답을 못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러니까 “과거심도 공했고 미래심도 공했고 현재심도 공했다면 그 마음을 어디다 찍느냐?” 했는데 그 대답을 못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떠하시겠습니까?
큰스님: 이렇게 먹으면 될 것 아니냐? 이게 내가 아까 얘기했잖냐? 내가 먹고 싶으면 먹고,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으니까 그게 점심이야, 점심! 내가 그냥 먹는 게 그냥 점심이란 말이야, 진짜로! 그 직통으로 아주…. 그러니까 이 질문하는 거를 갖다가 내가 딱 집어서 그거를 얘기 안하는 것은, 모든 주변의 이렇게 돌아가는 거를 얘기를 하고 그게 돼야 이게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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