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_189-1996년 6월 2일 천차만별의 용도에 따라
본문
질문: 우리들이 선원에 와서 들어올 때부터 법당에 앉을 때까지의 여러 가지 예법들, 하다못해 절하는 자세도 참 각양각색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예법도 하나의 행의 규범이 돼가지고 그걸로 인해서 또 믿음을 더욱더 공고하게 해줄 수 있는 그런 가능성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한 요식이랄까요, 절차랄까요. 그러한 행의 어떤 자세를 스님께서 좀 이렇게 가르침을 이렇게 문서로 하시든지 그렇게 좀 구체적으로 해주시면 상당히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큰스님: 웬 그렇게 말이 많습니까? 그런데요, 세상살인 말이 많죠. 수억 겁을 거치면서 그 습관 된 찌든 그 문제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믿고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 한다’ 하는 겁니다. 그럭하다 보면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기 위해서 모든 거를 거기다가 놓다가 못 놓다가, 놓다가 못 놓다가 이렇게 실갱이를 하고 갑니다. 가다가 보면 인제 ‘아, 이게 조금 좀 미급하구나.’ 할 때는 거기서 체험을 좀 하게끔 합니다. 그렇게 자기 그 근본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이끌어주는 마음도 역시 그렇게 하곤 있습니다. 그러면 그 체험을 봐서 그 줄을 잡고, '아, 이럭하면 이렇게 하는 거로구나.' 그러곤 그 줄을 잡고, 하나를 잡고 갑니다. 가다 보면 엉뚱 나가게 또 딴 걸로 돼 가지고 딴 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도. 그건 왜 그러냐? 세상만사가, 그 용도가 천차만별인데 어떻게 한 용도의 그 한 굴림만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떠한 용도가 오든 이렇게도 굴리고 저렇게도 굴려서 자기네가 지혜를 낳아서 이게 작용하는 거지, 어떻게 그거까지 마저 일일이 그걸 쫓아다니면서 가르쳐줍니까? 그러니까 거기에서 스스로 지혜롭게, 스스로 네 스승을 네가 스스로 찾아라 이겁니다. 네 스승을 스스로 찾는다면 그 안에서 다 길잡이도 되고, 그것도 그저 용도에 따라서 나오는 대로 처리하면서 굴리는 도리가 스스로 지혜롭게 나오는 거다 이거야. 그러는 거지 일일이 이거를, 그 먹지 않던 것도 자기가 먹어봐야 그거를 맛을 알듯이 본인이 먹어보지도 않은 맛을 어떻게 보라고 합니까? 그러니까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로 요약해서 '용도를 이렇게 이렇게 하는 대로, 닥치는 대로 굴려라.' 이렇게 하면은 그 굴리는 것이 용도에 따라서 굴림이 오는 거지, 아픈 것도 그냥 그 주인공에다가 해서 하면은 그게 약사가 되고, 이렇게 자꾸 굴림이 바꿔지는 겁니다, 이렇게. 그러니까 주인공은 하나인데 아픈 거는 어떻게 하느냐? 아픈 거면 아픈 것대로 통신이 돼서 약사가 돼주고, 또 어떠한 가정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주인공에서 입자가 나와서 조절해서 관세음이 돼주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이 입자라는 말을 안 하고 보살이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부처님의 마음이 즉 이름이 보살이요, 바로 그것이 법신이요, 그것이 화신이요,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 자체가 용도에 따라서 이름이 제각기 나오는 거죠.
그러니 주인공은 하나인데 그 주인공 속에서 천차만별의 이름이 나오니 그건 무슨 연고냐 이런 말입니다. ‘주인공’ 하면 일체제불의 마음 전체가,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가 한데 합쳐지는 연고입니다. 그렇게 합쳐지는 그 마음 속에서 바로 '내가 아픕니다.' 하니까 거기서 그 마음이 통신이 돼선, 즉 말하자면 보살이, 약사보살이 탁 응신으로서 응해주는 거죠. 의사한테서, 예를 들어서 의사한테서 병명이 나와야 그 밑의 간호원들이 다 움죽거리죠? 통신이 돼야 어떻게 보살들이 움죽거리죠, 응신으로서. 그러니까 겁날 것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이 공부가.
그래서 조심할 거라는 건 바깥으로만 끄달리지 말아라 이거죠. 부처님도 그러셨지만 옛날에 예수도 그랬어요. 내가 생각할 땐, 내가 지어서 지금 그냥 말하는 겁니다. 예수도 “각자 자신을 믿어야지, 너를 믿지 않고 타의의 타인을 믿는다면 그건 마구니의 짓이니라.” 했을 겁니다. 그러나 ‘각자’ 소리를 안 했기 때문에 예수가, 각자 소리를 안 했기 때문에, ‘나를 믿어야지’ 하는데 ‘모두 각자 나를 믿어야지’ 요렇게 해야 되는데, “나를 믿지 않고 타인을 믿는다면 전부 마구니의 짓이니라.” 이렇게 말을 했으니 모두 예수 하나로 그냥, 그냥 들어가 버린 거죠. 그러니까 그 예수의, 예수라는 껍데기를 찾아 들어간 거죠. 예수의 진짜 마음이라는 건 자기의 마음이 알아서 예수의 마음도 둘이 아니게 통신이 돼야 되는 건데 그런 거죠. 그런데 부처님은 아주 똑바로 “각자 너희들의 자성을 믿지 않는다면 모두가 허깨비 같은 일이고, 모두가 꿈과 같고 바람과 같고 도깨비 같으니라.” 이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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