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78_1998년 7월 5일 이름조차 없는 이름
본문
옛날에 이런 예가 있었죠. 그건 옛날뿐이 아니라 어떤 중이 말입니다. 시장에 무엇을 사러 가면 쭉 한바탕 돌아봐요. 돌아보다가 어린애를 업고 앉아서 요만큼 갖다 놓고 파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인네들이 또 뭘 갖다가 요렇게 조금 놓고, 물건이 많질 않으니까 빨리 시들고 빨리 그게 참, 애가 타는 거죠. 그러면 섰다 앉았다 섰다 앉았다 한다고요. 그거를 뒤집어 놨다가 바로 놨다가 하면서.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그런 분이 있어요. 그런 분을 위해서 그걸 사들이는 게 아니에요. 보시를 하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죠. 단 내 마음이 아프니까 내 마음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걸 몰아서 그런 것 쫓아다니면서 사는 거예요.
그분들을 위해서 한다고 그러면 이거는 잘못돼 돌아가는 거예요. 내 마음이 편하자고 해서…. 이 다리가 없는 사람들이 파는 물건은 더 비쌉니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팔 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팔 거나 이런 사람이 눈에 띄거나 이런다면 그 사람을, 다리 그렇게 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바로 내가 아픔을 면하기 위해서죠. 그러니까 이게 둘이 아닌 마음이 스스로서 생겨야 되죠. 이게 예전부터, 과거부터 내려오면서 우리가 엇갈려서 네가 되고 내가 되고 네가 되고 내가 되고,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이렇게 엇갈려 내려온 인생이기 때문에 그 도리를 알면 첫째, 내가 거북하고 내가 편안치 않고 내가 괴로워서…. 만약에 예를 들어서 그렇게 파는 사람이 나였다, 또 그렇게 파는 사람이 내 아버지나 내 어머니였다 그런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서예요. 누구를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나를 내가 돕기 위해서 하면 그 사람은 역시 둘 아니게 도와지고 나 역시 편안하고 좋은 거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한테는 항상 그저 누구한테도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섭섭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 또 똑같은 말이라도 그냥 측은하게 하는 말이 있고, 아주 섭섭지 않게 잘 말하는 게 있고, 성을 붉히고 그 말을 하는 게 있고 여러 가지죠. 가지 가진데요, 그것이 내가 살아온 모두를 생각한다면 하나도 잘못됨이 없어요. 누구나가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터득이 아직 안돼서 그럴 수도 있고, 아직 사람이 100% 될 수가 없어서 그런 것도 있고 그러니까 내가 걸어온 그 길이 똑같은 길이에요, 아주. 그러니까 남이라고 볼 수가 없죠. 그래서 이 말을 누가 질문을 했느냐 하면요, 언젠가 누가, 외국에서 사는 사람인데 여기 한국에 와서 찾아왔는데요. “내가 여기에서 근 한 달을 이렇게 보면서 이렇게 살아 왔는데 그전에도 외국에 가기 전에도 스님을 봐왔고 그런데 꼭 시장에 가면 나쁜 거를 사가지고 온다고 모두 그러는데 그 왜, 이왕이면 좋은 거를 사시지 왜 나쁜 물건, 시들고 그런 물건을 삽니까?” 이런 질문을 해요. 그건 무슨 까닭이냐고요.
그럼 뭐라고 대답을 했겠습니까? 내 물건이니까, 빨리 시드니까 시든 것부터 먹으려고 그런다고. 그렇게도 대답을 한 예도 있고, 지금처럼 대답한 예도 있고 여러 가지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토론 법회를 갖자고 한 것도요, 우리가 여기에서 말한 것만 질문을 하라 이런 소리가 아니에요. 그래야 지혜가 넓혀지죠. 이건 우물 안에서만이 내가 제일이라고 해서는 안되죠. 바다로 나가서 남이 똥 싸는 것도 보고, 기름 엎질러서 그냥 그 바다로 하나가 되는 것도 보고, 또 고름 물도 들어오고, 흙 물도 들어오는 거, 죽은 사람도 거적을 쓰고 죽는 사람, 또 호화롭게 죽는 사람, 또 남이 호화롭게 보는 사람, ‘저거 잘 죽었어.’ 하고 보는 사람, 이런 문제들이 허다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참 행복을 느끼고 산다’ 이거는 하루아침에 밥 먹을 게 없어도 행복할 수만 있다면 밥 먹을 거는 저절로 오게 돼 있거든요. 그 뜻을 아마도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 거예요. 왜 밥 먹을 게 없는데도 어떻게 좋을 수가 있느냐, 이럴 거예요. 우리가 나무 얘기를 비유를 자꾸 하는데, 나무를 볼 때 뿌리가 있기 때문에 그 나무의 싹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무 걱정을 안 해요. 뿌리가 있기 때문이죠. 그와 같이 우리가 불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 그 불성이 형성시켰고 불성의 종자고 아, 형성시켜서 지금도 이끌고 가고 있고 그런데 왜 주인의 걱정을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해야만 됩니까? 그렇다고 해서 잘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항시 거기에 맡겨라 맡겨라 이런 말도 했고, 나는 공했으니까 없다. 나는 본래 이미 죽은 거다. 공해서 죽은 거다. 자타가 같이 죽은 거다. 자타가 더불어 같이 나투고 이렇게 그냥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니까 또 그거 역시도 죽은 거다 이거야, 모두가. 둘이 없이 고요, 텅 비었으니까 둘이 없어요. 둘이 없이 안과 밖이 비었으니까 텅 비었다 이거야. 비었으니까 고요하니 그냥 ‘그 이름도 없는 그 이름이지마는 아주 찬란하다’ 이런 뜻에 속하죠. 그러니까 ‘이름조차도 없는 그 이름이여’ 하는 말을 할 수 있게끔 되는 거죠.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다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본래, 본래 그대로 부처예요. 그런데 차원에 따라서 이것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그 인과성이나 유전성이나 이런 거를 모두 인연으로 삼았기 때문에, 몸뚱이 속에 인연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때가 되면 그게 나오고 괴로움이 생기고 이러죠. 그러니까 그러한 거 저러한 것을 모두가 우리가 따지고 보면 한없이 편안한 겁니다. 세상에 오늘 살다가 오늘 죽으면 어떻고 내일 살다가 내일 죽으면 어떻습니까? 뭘 그렇게 어렵습니까? 내가 죽는다 산다를 떠나면 그냥 편안한 겁니다. ‘먹고 살아야 한다’ ‘좀 더 괜찮게 살아야겠다’ 이런 게 없이…, 그래서 이런 말을 이렇게 하죠. “함이 없이 하라. 너는 이미 공했다. 너는 이미 공해서 없다. 너가 하는 것도 없고 너가 앞으로 할 것도 없다. 그래서 너가 공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나온 것도 없기 때문에 갈 것도 없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 도리를 우리가 알려면 적극 이게, 그냥 무조건 이런 걸 알고 저런 걸 알아야겠다 하고 경전을 보고 이렇게 하시는데, 경전이 말해 주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이 불성이라는 것은 내 뿌리 내가 믿고 내 뿌리에서 내가 에너지를 쓰는 거예요.그 래서 누가 주거나 누가 뺏어가거나 그런 게 없어요. 그런 거부터 알아야 이게 나중에 ‘아, 이렇게 보니까 이렇구나.’ 하고 책을 한번, 경전도 볼 수 있고요, 그때 가서. 또 남들이, 남의 스님네들이 말씀하신 것도 한번 질문도 해보고요. 또 여러분들이 살면서 ‘어떻게 이 고통이라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이럴까.’ 그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시면 간단하죠. 내 뿌리를 내가 믿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인 거죠. 믿는다면 죽어도, 지금 죽는다 해도 그냥 웃음이 나는 정도죠.
예를 들어서 이렇게 한 번도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병이 났는데, 여러분들 이게 두 가지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죠. 사람의 손을 빌려야만 될 수 있는 건 뼈가 부러지고 또 때에 따라선 수술을 해야만 될 때에 손을 빌리는 게 있고요. 때에 따라서는 ‘내가 해결할 수 있다.’ 하는 거는요, 여러분들의 몸뚱이가 하는 게 아니고 나는 이 속에 만물박사를 두었기 때문에, 여기에는 약사도 있고 의사도 있고 관음도 있고 지장도 있고 보현도 있고 법신도 있고 다 있기 때문에 뭐든지 여기서 할 수 있는데 왜 딴 집으로 내가 구걸하러 다니느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왜 딴 데로, 딴 집으로 다니면서 구걸을 하고 살아야만 되느냐는 거 말이에요.
이 도리를 모르는 분들한테 그런 말을 하면 미쳤다고 하겠지만요, 나는 실질로써 내가 실험하지 않은 거는 말을 못하죠. 왜? 말 한 마디 잘못하게 되면 그 사람이 그게 옳은 건 줄 알고 잘못 갔다가는 그 사람이 한데 빠지면 나까지도 거기 포함돼요. 그렇기 때문이에요. 그게 무서워서가 아니에요. 나 때문에 괜히 그 사람까지 빠져서 이 한 생을 넘겨서 벗어날 거를 갖다가 세세생생을 그냥 벗지 못하게 외려 만들어 놓는 거니까.
이거는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재미없는 것도 아니에요. 이거는 맘대로 웃을 일도 아니고 울 일도 아니에요. 그러니 얼마나…, 여러분들 그 말을 많이 들으셨겠죠. ‘물같이 살라’ 하는 거요. ‘바람같이 살라, 구름같이 살라, 산같이 살라’ 하는 말을 여러분들이 잘 아시리라고 믿어요.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하면 좋은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해서 걱정이죠. 인생은 그렇게 한 생 살기가 그렇게 바람같이 사는 거죠. 내가 항상 그거를 일깨워 드리기 위해서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진다. 바람 같이 없어진다. 차는 지나가는데 지나가는 거는 과거고 현재 앞으로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그냥, 묵묵히 그냥 걸어갈 뿐이다.’라고요.
그러고 ‘우리 사는 게 고정된 게 없이 보는 거, 듣는 것도 그냥 한 가지만 듣는 게 아니다.’라는 얘기. 한 사람만 만나는 게 아니다. 한 가지만 먹는 게 아니다. 수많은 거를 바꿔서 돌아가면서 말을 하고 마음을 내니 그 마음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마음은 없는 겁니다, 아주. 너무나 많아서. 그래서 마음이 없기 때문에 공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살면서 이 도리를 모른다면 헛탕 그냥, 한 생을 헛탕 그냥 사는 거예요, 헛탕! 지금 우리가 밥을 잘 먹고 돈을 잘 쓰고 옷을 잘 입고 이게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우리 마음에, 이 우리 우주 천체로 봐서 우리 지금 세계가 어떻게 사느냐에 딸린 것도 우리 마음에 달린 거예요. 우리 마음이 얼마나 귀중합니까,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누구나가 잘 되는 걸 좋아하지 못 되는 걸 좋아하겠습니까? 아무리 국운이 없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국운을 있게 만드는 거죠. 그러고 너무 잘못하는 거는 좀 제거시켜면서 이렇게, 잘 이렇게 돌려서 이렇게 해 나가는 것이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예전에는 너무도 사람들이 모르는 게 많아서 불로 재앙을 받고 물로 재앙을 받고 산이 무너지는 걸로 재앙을 받고 이렇게 했어요. 많은 재앙이 닥쳐왔죠. 바람으로 재앙을 받고…. 그러나 지금은 안 그래요. 마음으로 재앙을 받게 돼 있어요. 그러고 마음을 뺏기고 살고, 마음을 잡아먹고 살고, 이러는 시대가 됐다는 얘기죠. 아까 내가 배추나 무우 이런 얘기 한 것도, 그거를 생략해서 하나로 얘기를 했지만 우리는 전체 그렇게 해야 된다는 얘기죠. 강제가 아니에요, 스스로죠.
예를 들어서 어떠한 사람이 참, 분해서 애를 쓸 때에 어떠한 말 한 마디를 해서 가라앉혀 줄 수 있고…. 그러면 그 가라앉혀 주는 반면에 그 사람이 그 액운을 다 면할 수 있어요. 그거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냥 와락와락 해버리면 액운이 보이지 않는 데서 따르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액운을 없애주는 데도 멋있는 일 아닙니까? 우리가 돈으로만, 있다고 해서 보시한 거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심 보시 즉, 공심의 보시. 그러니까 무보시라고 해도 되죠. 무주상 보시! 그런데 우리가 무주상 보시만, 무주상 보시는 제 일의 보시고 당장 볼 때에 ‘참 안됐다.’ 이러면 내가 있으면 주고 없으면 무주상으로라도 해야죠. 그러면 무심으로 했던 그 무주상이 그대로 이어져서 그대로 그 이튿날로도 발생이 될 수 있거든요. 난 그거 다 겪어보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그것을 아무 말 없이 여러분들한테 그냥 100% 다 내가 대신 해드린다면 여러분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해요. 정말입니다. 여러분들의 몸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부딪침이 있고, 가난하기 때문에 그 가난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인가를 더더욱 더 잘 알게 되고, 부자로 살면 그 가난을 모르기 때문에 그 가난 속에서 인생이라는 걸 찾지 못 해가지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수가 아주 많죠. 여러분이 가난하고 없는 거를 한탄하지 마시고, 우리가 일생에 한 생을 이렇게 태어나는데 눈물 흘리고 가슴 아프고 그런 일들이 한두 건입니까? 그렇지만 그거를 자기, 안 보이는 자기한테 다 맡기고 ‘너만이 길을 찾아가게 할 수 있고, 너만이 너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할 수 있고, 너만이 지켜주고 너만이 이끌어줄 수 있어.’ ‘그래도 애들은 먹여 살릴 수 있어야 하고 애들은 굶기지 말아야 하잖아.’ 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그 마음 태도가 아주 필요할 때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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