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87_2001년 1월 7일 몸은 부지런히 마음은 편안하게
본문
질문: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면 이 육신은 나뉘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둘이 아니고 마음이 하나라고 한다면 내 동료나 같은 도반이 어느 한 사람이 견성을 했다면 나도 같이 견성을 해야 되고 또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착한 마음을 가졌다면 나도 같이 착한 사람이 되고 또 나쁜 마음을 가졌으면 나도 같이 나쁜 마음을 갖는 사람이 되고 그렇게 해야 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질 않거든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큰스님께서 둘이 아니다 둘로 보지 마라 하는 법문을 수없이 많이 하셨고 저희네들도 그걸 듣고 그렇게 하려고 퍽이나 노력을 했습니다. 그랬는데도 그 둘이 아닌 도리에 대해서 육신은 뭐 이해가 갑니다. 둘이 아니라는 것이 지수화풍으로 되어 있는 거기 때문에 이 육신이 인연 따라서 이리도 모였다 저리도 모였다 한다 하면 하나라는 건 이해가 가는데 마음까지도 둘이 아닌 도리에 대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가르침 바랍니다.
큰스님: 우리가 항상 몸을 보시면 아신다고 그랬죠. 몸을 보실 때 공체(共體)죠. 이게 간단히 말해서, 공체로 우리가 살죠. 그런데 딴 사람도 공체란 말입니다. 딴 사람도 공체고 나도 공체고 전부 여기 있는 분들 다 공체입니다. 공체고 공생(共生)이고, 공심(共心)이고 공용(共用)을 하시고 사시고 또 공식(共食)으로서, 우리가 들이고 내고 하는 것도 공식으로서 그냥 들이고 내고 사십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전체가 공해서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근데 여러분이 사시는 것도 역시 그래요. 지수화풍으로 생겨서 사는데 지수화풍이 있어야 또 살죠. 지수화풍을 먹고 살죠. 근데 여러분들이 보는 눈 하나를 본다 하더라도 눈으로 여기저기 보지 한 군데만 보고 사는 분 없죠. 듣는 귀도 그렇고요. 모두가 몸 전체가 다 부딪히는 대로도 그렇고 다 이렇게 잠시 살짝 살짝 그냥 넘어가죠. 화해서 넘어간단 말입니다. 이거 보고 이거 보고. 이거 듣고 저거 듣고. 이 사람 만나고 이 사람 만나고. 이렇게 화해서 돌아가죠. 그러니까 “함이 없이 사십니다.” 이겁니다. 함이 없이 사십니다. “사시는 게 없이 삽니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들이 그냥 성을 내고 막 악을 쓰고 그러다가도 예를 들어서, 자기가 악 쓰고 그런 새가 없는데 악쓰고 그랬다는 자체가 바로 마음 속에 남습니다. 그래 그게 남으면 그게, 즉 말하자면 악이 되고 업이 되고 그런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그 업이나 악이나 그런 거를 풍기지 마시고, 이게 어떠한 문제라고 하더라도 이걸 내 탓으로 돌려야지….
보세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잘 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내 탓이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내 탓이 아니지만 태어났지 않습니까? 태어났으니까 잘하든 못하든 내 탓이지 누구 탓입니까? 그러니까 내 탓으로 돌려라 이거죠. 부인의 탓으로 돌리거나 자식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그러죠. 자식이 막 나가서 도둑질을 하거나 남의 집의 문을 깨뜨렸거나 이래도 그건 부모가 물어줘야 하는 거죠? 그건 자식이 깨뜨렸다고 자식이 무는 게 아니에요. 부모가 물어야죠. 그러고 부모가 책임이고요. 그렇게 내려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이 남의 책임이 아니라, 한 가정이라도 모두가 자기, 제각기 다 자기 책임이죠. 어느 한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싸울 필요도 없고 뭐, 그렇게 멋지게 싸울 필요는 있겠지만 멋지지 않게 싸울 필요는 없죠. 그러고 니 탓이니 내 탓이니 하고 싸우고 너로 인해서 망했다 너로 인해서 흥했다 이런 소리도 없을 테고. 그러니까 돈도요, 돈이 될 거라면 요렇게 그 집을 좀 들여다 보면요, 길에 지나가다가도 이게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가는지 그걸 알아요. 그래서 ‘저 집으로 들어가면 되겠다.’ 이러면 돈이 엄청 엉뚱 나가게 생기는 수도 있죠. 그러니까 그것이 이 물질이 다 말을 들을 줄 알고 볼 줄 알고 생각할 줄 안다는 얘깁니다. 우리 사람만 그렇게 하고 가는 게 아니라.
질문: 감사합니다. 어떻게 저 개인 행동까지 아시고 그냥 말씀하시는 것 같아, 제가 부인 탓을 많이 하거든요. 나는 안 그런데 저 사람은 왜 그런가 하고 탓을 많이 합니다. 네 번째 질문 여쭙겠습니다. 살아가는 생활 태도에 대해서 여쭙고자 합니다. 큰스님께서 법문 하시기를 부처님께서 “나는 할 테니 너는 뛰어라.” 이 멋진 말이라고 하시면서 그런 법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은 모든 일처리는 원하는 대로 부처님께서 할 테니까 실질적인 처리하는 것은 몸뚱이가 뛰어다니면서 그걸 실행에 옮겨라 그런 말씀으로 이해가 갑니다. 근데 사실 관을 하고 편하게 살라고 그러셨는데 관하고 편하게 살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면 몸이 게을러집니다, 솔직히. 가령 예를 들어서 짐승들도 배가 고파야 사냥하기 위해서 뛰고 또 위험이 닥쳐야 뜁니다. 주인공에 맡겨 놨으니 모든 것이 잘 될 걸로 생각을 하고 마음이 편해지니까 자꾸 게을러집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되는 건지 참 어려운 문제들이 저희들한테 상당히 답답합니다.
큰스님: 댁에는, 여러분들은 편안하게 사시라 그러면 몸이 편안한 거를 생각하시는데 몸이 편안한 게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면 몸이 아무리 뛰어도 편안치 않은 게 하나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편안하게 사시라고 그러는 겁니다. 일을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많이 해도 군색함이 없고 편안합니다. 그러고 또 ‘이걸 해야지.’ 하고 하는 일은 아주 편안합니다. 그러니까 모두 일하고 밥 먹고 똥 누고 얼마나 편안합니까. 똥 못 눠도 참 편안치 못한 겁니다, 그거. 그러니까 일을 하시는 데도 편안하시고, 마음도 편안하거니와 변소에 가도 시원하고, 이거 모두가 좋은 거 아닙니까. 소화 잘 되니 좋고. 모두가 좋은 거니까 편안한 생각을 하시고 편안한 일이 닥치게끔 하고 내가 부지런히 뛰게끔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편안하단 얘깁니다.
우리가 몸이 편안한 거를 말하지 마시고 하루 우리가 일을 안 하면 먹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일을 안 하고 어떻게 먹습니까? 그래서 우리 이 승려들도 그저 한 치도 쉬지 않고 움죽거립니다마는 편안합니다. 편안하게 삽니다. 이유가 없으니까요. 누구의 탓이 없고 이유가 없으니까. 일이 내한테 닥치면 닥치는 대로, 닥치는 대로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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