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법문_165-1997년 1월 19일 알고 보고 들었다면 실천하라
본문
질문: 큰스님! 질문 올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포항지원에서 온 김혜자입니다. (삭제) 처음 선원에서 공부를 시작해서 조금씩 체험이 되는 과정을 시나 글로 적어서 스님에게 몇 번 보여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스님께서 “백지 편지를 써 보세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백지 편지라는 편지 아닌 편지를 쓰기 위하여 저는 한 일 년여를 몸부림을 치면서 참구에 참구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들어가는 길은 천 갈래 만 갈래이지만 나오는 길은 한 길뿐이라는 편지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참으로 경이로움의 세계였습니다. 여태까지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했고 어느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가 있음에 정말, 정말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선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를 계속하고 보니까 ‘산은 산이다, 물은 물이다.’ 하는 그런 것이 이 나오는 길이 한 길임을 알고 나면은 무슨 별천지 세계가 벌어질 줄 알았던 그런 희망이 공부를 조금 더 해보니까 그것이 아니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평상심,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그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별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기고만장한 세월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법회도 조금 빠져 먹고, 옛날 그림책 구경도 조금조금 하면서 그럭저럭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희 지원의 스님께서 질문을 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는데 산이 산이 아니며, 물은 물이 아님이라는 그 말씀에 저는 멍해졌습니다. 그래서 산이 아닌 도리, 물이 물이 아닌 도리를 참구하기 위하여 두 달여를 몸부림을 쳤습니다. 참구에 참구를 거듭하고 보이지 않게 피를 철철 흘리면서 문 아닌 문을 부딪치면서 너무나 답답한 가슴을 이길 길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헤매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 전입니다. 증조모님 제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루종일 음식을 장만해서 제사상을 차리고 있는데, 지방을 써 가지고 상 위에 탁 올리는 순간 큰스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큰 바다에 파도가 일어 한 줄기 물방울로 나투어진 것이 옴이요, 파도가 멎어 물방울이 가라앉음이 가는 것인데 언제까지 큰 바다에 하나가 돼 있는 그 조상을 어느 물이 내 조상이라고 붙잡고 늘어지려 하는가,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그 말씀이 딱 떠올랐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저는 너무나 또 다른 세계가 ‘아, 이것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정된 관념을 깨면, 증조모님이라는 그 고정관념만 깨서 절대의 바다로 보낼 수만 있다면 아, 그렇다면 그 절대의 바다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그 절대의 바다는 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이 됨과 동시에 상이 획 돌려져서 저를 향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증조모님을 향하여 절을 올리고 밥을 올리고 수저를 올렸던 그 쪼개상이 나에게로 획 돌아서는 그런 느낌이 들 때 저는 관념적으로 알았던, 이론으로 알았던 그런 모든 것보다 너무나 가슴이 시원함을 느끼면서 그 순간 번개같이 번쩍 번쩍 번쩍 그 느낌의 의식들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저를 스쳐갔습니다. ‘아, 이것이구나. 산이 산이라는 그 관념만 깨고, 물이 물이라는 그 고정관념만 깬다면, 산으로 물이 흐르는 그 소식과 진흙소가 강물을 건널 수 있는 그 소식이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 기쁨도 잠시 또 며칠이 또 흘렀습니다.
그런데 또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큰스님 말씀이 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법회에서 수없이 들었던, 무심코 들어 넘겼던 그 말씀이 그 순간 너무나 아프게 저를 찔러댔습니다. 큰스님! 말로 할 수 없는 그 자리를 굳이 말로 이렇게 질문을 올려야 하고, 대답해야 하는 큰스님의 고충을 정말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떠오른 큰스님의 그 말씀이 도저히 제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그 절대의 바다마저도 마셔야 하고 마신 것을 토해야 하고, 토한 것을 함께 더불어 먹여 살려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그 절대의 바다에 오기까지 너무나 힘들었는데, 그마저도, 그 절대의 바다마저 삼키고 토하고 더불어 먹여 살리라는 그 엄청난 도리를, 가도 가도 너무나 막연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현상계의 큰 바다 위에 한 방울의 물로 나투어진 저희들이 현상계에 머무는 이 짧은 기간에 그 엄청난 도리를 어떻게 하면 좀 쉽게 알고 갈 수 있을는지 큰스님의 높으신 법문을 바랍니다.
큰스님: 우리는 지금요, 시공을 초월해서 살고 있어요. 시간과 공간은 초월해서 살고 있다구요, 지금. 그런데 그것을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예가 여러분들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산다, 넘어서서 산다. 우리가 정신이 아니라면 몸을 어떻게 이끌어 가지고 가겠습니까? 저 언덕이라는 그 자체가 바로 정신계거든요. 그리고 내가 항상 말했죠?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나툰다. 고정된 게 없이 화해서 찰나찰나 나투면서 일거수일투족을 그렇게 생활을 한다. 걸어오는 발자취가 앞으로 걷지 않았으니깐 없고 뒤는 자꾸 가니깐 없고, 현재에도 공해서 떠벅떠벅 떼어놓고 올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 생활을 하되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다면 그대로 아까 말마따나 “물 마시고….” 누구 말마따나 “팔 베고 누웠으니 이만하면은 아주 족한 것을” 하는 그런 말이나 똑같은 얘깁니다. 그리고 또 고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들을 하고 이러한 뜻을 가지고 이렇게 실천을 하려고 애를 쓰고 가는 이 마당에서 될 수 있으면 이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 의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또 만 가지, 천차만별의 만 가지 일을 연구를 한다 하더라도 손색이 없다. 지금 과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해서, 발명해서 발표를 하고 이랬지마는 이 부처님 법이란 아주 심오하고도 묘하고, 광대하고도 무변해서, 즉 말하자면 내가 누구든지 하고 싶은 대로 그것이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거는 연구해서 되고 어떤 거는 안 되고 이런 게 아니라 모든 거,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느 거 하나 건지지 못하는 게 없다. 왜냐? 그렇기 때문에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도, 하다못해 물 한 방울도 안 돼 보신 분이 아니다 이거야. 물 한 방울도 돼봤던 분이기 때문에 물 한 방울에도 자기가 그 이름이 거기에서 솟아 오른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그 천차만별의 이름들을, 천차만별의 모습들을, 천차만별의 마음으로써 연구하고 사는 그 모습들을, 모두가 부처님 한마음에 들어 있으니 그 마음 하나에서 다 천차만별의 가지가 가지가지마다 거기에서 풀리고 나온다. 우리가 한 가지를 뭐를 해서, 이렇게 연구를 해서 발표를 하고 발표를 해서 남들이 다 알게 하는, 그 어떠한 조그마한 걸 하나 만들어서 놓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우리가 본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살기 때문에, 본래 정수에 컴퓨터로, 자동적인 컴퓨터로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능히 어느 거든지 주어지니까 내 마음을 마음대로, 내 마음이 마음대로 넘어서라 이거예요. 내 마음이 주저주저하지 말고 마음대로 넘어설 줄도 알아야 된다. 걸을 줄도 알아야 된다. 내 마음이 깊은 물 속에도 들어갈 줄 알아야 된다. 내 마음이 우주 법계를 돌 줄 알아야 된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의 오신통이라는 이거를 그냥 굴릴 줄도 알아야 된다. 이 모두가 천체, 바로 그 도리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그대로 합류화 돼서 돌아간다는, 수레와 같은 그러한 이칩니다.
그런 거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이 오신을 다 한데 합친 통을 굴려서 마음대로 적응하고 마음대로 연구하고 마음대로 발전시킬 수 있는 문제도, 그것을 못 하는 사람들은 하나만 연구해서 내놓을 줄 알았지, 거기에서 더 깊이 들어가서 정말 실질적으로 우주의 에너지를 꺼내 쓸 수 있느냐 이런 문젭니다. 그럼 우주의 에너지는 건당 나오는 게 아닙니다. 우주에도, 이 우주 삼라만상에도 생명들이 꽉 찼기 때문에 에너지가 있는 것입니다.
질문: 한 가지 질문 더 올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이 삼층 법당에 와서 새벽에 이렇게 앉아서 꽃꽂이 해 놓은 걸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아까 어떤 거사님은 화엄을 얘기하셨습니다마는, 저는 거기에서 거대한 불바퀴를 보았습니다. 큰스님께서 언젠가 말씀하신 그 불바퀴가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각양각색의 색깔로 나투어진 큰 하나의 나툼, 그 어마어마한 나툼의 도리를 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꽂으신 분이, 뭐 여러 가지 보는 각자의 차원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마는 저는 큰스님께 무시 이래로 물 한 방울도 보태짐도 줄어짐도 없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그런 언어도단의 자리이지만 그 자리의 나툼이 굳이 우리 현상계로 생각을 한다면 감도 있으며 옴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다면 어찌 생각하면 아무 작용이 없을 것 같지만 무한한 작용으로 저렇게 나툼의 세계를 펼쳐 보일 수 있는 그 성품의 묘한 작용에 대해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큰스님: 집이가(댁이) 알아들을 줄만 알면 될 줄 알지만 그게 아니요. 실천을 하는데, 그렇게 알고 있으면 먹어봐라 이런 뜻이죠. 즉 말하자면 이거를 보고 알고 있는데, 알고 있다는 것은 말들은 모두 잘해요. 이 세상의 스님, 큰스님네들이 “이 물이 이 컵으로 하나가 잔뜩 들어 있으니 이거를 먹어봐라.” 하고선 말들은 잘하시는데, ‘아무 말 없이 말을 하면서 이거를 갖다 먹고 갖다 먹일 줄은 모르더라.’ 이런 말들이 많아요.
물론 내가 잘났다는 사람 잘난 거 하나도 없죠. 못난 거든지 잘난 거든지 부처님께서는 일체를 다 다복하게 인연을 지었으니깐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알고 보고 듣고 했다면 실천을 하라. 실천을 하기 위해서 육조 스님은 10여 년을 실천을 하는 데 노고를 했다 이거야. 그게 점수야. 면벽을 하는 것도 그냥 면벽을 하는 게 아니라, 세상 천지에서 내가 나를 던질 줄 알고 행할 줄 알고, 늘일 줄 알고 줄일 줄 알고, 그렇게 굴릴 줄 아는 바로 이름 없는 이름이 돼야 되겠죠. 그러니까 하나하나 집이가(댁이) 지금 그렇게 안다면 ‘마음을 마음이 뛰어넘어서 실천을 하는 데에 노력을 해라. 말만 앞세우지 말라. 이, 알았으면 해봐라. 길을 걸을 줄 알면 뛰어봐라. 뛸 줄 알면 날아 봐라. 날아보면 두루 돌아봐라.’ 하는 것도 바로 거기에 계제가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못났다 잘났다, 여자다 남자다 이걸 떠나서, 권세가 있다 없다 이걸 떠나서, 이것은 마음공부니까, 하여튼 아무 말 없이 그냥 실천을 하나하나 해나가 보세요.
- 이전글닥치는 대로 먹어치워라 24.02.26
- 다음글나를 발견한 후의 진실한 의정(疑情) 24.01.15